28Days Later
감독: Danny Boyle
주연: Cillian Murphy, Naomie Harris
좀비 장르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이다. 좀비는 죽은 자의 몸이 다시 움직여 사람을 공격하는 존재이다. 과거 좀비는 느릿느릿 걸어오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사람들을 공격했고, 대부분 B급 영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됐다. 그러나 현재 좀비는 빠른 속도로 뛰어와 주인공들을 쉴 틈 없게 만들어버린다. 괴력을 가진 근육질의 좀비나 독성을 가지고 있는 좀비까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좀비가 만들어지는 등, 좀비 장르는 한층 발전하여 A급 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런 좀비의 다양화와 대중화는 오늘 리뷰할 영화 <28일 후>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일 후에 등장하는 민첩하고 강한 좀비는 과거 좀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좀비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주인공 짐이 병원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짐은 의식이 돌아왔는데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간호사와 의사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병원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병원뿐만 아니라 런던 도시 전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도시를 배회하던 짐은 교회에 들어가지만 그곳에는 시체가 가득했고, 신부처럼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공격하여 다급하게 도망친다. 갑자기 나타난 2인조 덕분에 짐은 목숨을 건지고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듣는다. 바로 영국 전역에 분노 바이러스가 퍼져 정부가 마비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짐은 다음날 집을 찾아가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설상가상 짐의 실수로 좀비에게 습격받고 2인조 중 한 명이 감염되자 셀레나와 짐은 서둘러 안전한 장소를 찾아 도망친다.
그러던 중 셀레나와 짐은 아파트에서 나오는 불빛을 확인하고 다른 생존자가 있다고 확신한다. 결국 그들은 프랭크와 그녀의 딸, 해나와 만나게 된다. 겨우 한숨 돌렸지만 이미 런던의 물자는 바닥나고 있었고, 민간인을 보호하는 군용 시설이 있다는 라디오 방송을 믿고 맨체스터로 이동해야 한다는 프랭크의 주장에 셀리나와 짐은 부녀와 함께 동행하게 된다. 겨우 맨체스터에 도착하지만 이미 군부대는 전멸했고 설상가상 프랭크가 어이없게 감염되며 일행은 위기에 봉착한다. 하지만 무장한 군인 소대가 그들을 구해준다.
군인들은 한 별장에 방어막을 세워 생존하고 있던 집단이었다. 처음에 군인들은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나 사실은 셀리나와 해나를 겁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반항한 짐은 죽을 위기에 처하고, 세상이 망한 것이 아니라 영국만이 봉쇄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한다. 다행히 그의 기지로 군인들로부터 탈출한 짐은 자신을 추적하는 군인들을 처리하고 성공적으로 셀리나와 해나를 구출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총에 맞은 짐은 치명상을 입는다.
좀비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내가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좀비로 인해 황폐화된 문명의 모습이 마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는 사람들이 사라진 도시의 모습, 많은 인간을 사라진 만든 원인, 그리고 남겨진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무궁무진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전설이다>처럼 사람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서 갑자기 사람이 없어지고 단 한 명만이 도시를 배회하는 장면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 영화 초반부에 병원에서 깨어난 주인공 짐이 사람이 아무도 없는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에서도 관객은 주인공이 느끼는 답답함과 고독감을 느끼는 동시에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좀비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좀비의 빠른 전파력이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곧바로 좀비로 변하게 된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인간과 좀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영화의 인물들 또한 친구나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에게 감염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감독은 이런 극한의 상황 속의 주인공을 통해 인간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 특히 28일 후의 좀비들은 죽은 자의 몸에 영혼이 깃든 전통적인 좀비가 아닌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인간, 즉 병에 걸린 인간이다. 이런 설정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도덕적 고뇌를 더욱 심화시킨다.
영화는 인간이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동물인 동시에 동물인 동시에 생존을 위해 동족과 경쟁해야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이 경쟁을 위한 물리적, 사회적 폭력에 내재하여 있는 감정은 분노이다. 따라서 감염자들이 보여주는 분노는 본래 인간 내면에 잠재된 분노가 제어 없이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짐이 해나와 셀레나를 구하기 위해 군인을 죽이고 셀레나를 마주하는 장면이다. 짐이 군인을 죽일 때 보여주는 분노는 감염자와 인간이 같은 폭력적 본능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하며, 셀레나가 이런 짐을 보고 짐이 감염됐다고 의심하는 모습은 분노에 대한 영화의 메세지를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과 희생을 가치있게 그려낸다. 자신의 딸을 끝까지 지키려 하는 해나의 아버지 프랭크의 사랑이나 어린 해나를 대신하여 성적인 수치를 당하는 셀레나의 희생은 인간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지켜진 이성과 도덕성의 가치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특히 해나가 아버지의 장례를 원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장례는 죽은 자를 끝까지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노 바이러스 사태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에 급급하여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었고 그로 인해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시체는 장례 절차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는 가장 소중했던 아버지의 장례를 요구한다. 그런 해나의 모습은 아버지를 잃은 소녀의 슬픔과 순수한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짐과 셀레나, 그리고 해나가 모두 구출되는 첫 번째 결말보다 짐을 끝내 살리지 못하는 두 번째 결말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제대로 된 장례도 해주지 못하는 장면은 셀레나와 해나가 여전히 좀비들에 의해 쫒기는 생존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셀레나의 모습에 대해 관객들은 인간의 따뜻함을 느끼고 마음을 열었던 셀레나가 또다시 생존만을 생각하는 냉철하고 냉소적인 인물로 변할지, 아니면 해나를 지키기 위해 인간적인 면이 더 살아날지 고민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음악이다. <28일 후>의 BGM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영상이나 패러디에 쓰이는 이 음악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찝찝함과 기분 나쁨을 잘 표현한다. 또한 점점 커지는 음악과 빨라지는 템포로 관객을 긴장시키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21세기의 좀비 영화는 공포 영화의 하위 범주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장르 영화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산행>이 할리우드에서는 <월드워 Z>가 바야흐로 좀비 영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영화 <28후>는 21세기 좀비 영화의 바이블로, 새로운 좀비가 창작되고 대중화되게 만든 수작이다. 많은 좀비 영화가 <28일 후>의 좀비를 오마주하고 클리셰를 따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별!점: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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