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来のミライ
영화 정보
감독: 호소다 마모루(細田守)
출연: 카미시라이시 모카(上白石萌歌), 쿠로키 하루(黒木華)
러닝 타임: 98분
유튜브에서 우연히 <미래의 미라이>의 일본 예고편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약간의 일본어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의 제목이 말장난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미라이(ミライ)는 일본어로 미래(未来)라는 뜻이기에, 어린아이들이 흔히 하는 이름 장난이다. 한창 일본어 공부에 빠져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목이 더욱 기억에 남았다. 영화를 보기 전, 한국어 번제가 <미래의 미래>가 아닌 <미래의 미라이>로 되면서 이름에 대한 혼동은 피할 수 있었지만, 주인공 ‘쿤’ 같은 장난기 많은 제목을 한국인은 느낄 수 없다는 게 아쉬웠었다. 그리고 <미래의 미라이>라는 영화 역시 번제처럼 조금은 아쉬운 작품이었다.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컸던 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호소다 마모루 답지 않은 일상에 충실한 힐링물이었다는 점과 그로 인해 서사 진행의 원동력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약했다는 것이 리뷰를 쓰는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다시 영화 리뷰를 시작하게 해 준 작품인 만큼 감동적인 메시지와 세밀한 감정 묘사가 일품인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네 살 남자아이, ‘쿤’이다. 쿤은 출산 때문에 오랫동안 집을 비운 부모님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님이 새로 태어난 동생, ‘미라이’와 함께 돌아오자 쿤은 뛸 듯히 기뻐한다. 그러나 기쁜 것도 잠시, 부모님은 미라이를 양육하는 데 정신이 팔려 쿤에게 이전과 같은 관심을 주지 못하고, 쿤은 미라이에게 부모님을 뺏겼다고 생각한다. 쿤은 미라이와 사이좋게 지낼 것을 약속했지만 커져만 가는 질투심에 미라이을 괴롭히고, 오히려 부모님의 꾸중을 듣는다. 그런 쿤을 달래준 것은 갑자기 정원에 나타난 인간화된 강아지, 윳키였다. 그 후로 쿤은 부모님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 때마다 정원에서 만난 다른 시간대의 가족을 통해 갈등을 해소한다.
<미래의 미라이>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은 쿤의 내, 외적 갈등을 감정 묘사를 통화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관객이 어린아이의 감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영화는 미라이를 돌보기 바쁜 부모님과 어떻게든 관심을 끌려는 쿤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질투로 인해 혼란스러운 쿤의 감정을 관객이 흡수하도록 만든다. 또한 쿤이 아직 때를 부리는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중간중간 배치하여, 어찌 보면 답답할 수 있는 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동시에 관객이 쿤과 함께 질투와 동요를 느끼게 하였다. 외동이기 때문에 쿤이 느낀 질투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나도 쿤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공감과 동화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성숙해지는 쿤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응원하도록 유도하며, 결말에서 미라이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정원과 떡갈나무는 <미래의 미라이>에서 가장 특징적인 장치이다. 쿤의 질투는 정원의 떡갈나무를 통한 시공간여행으로 해소된다. 쿤은 미라이에게 질투를 느낄 때마다 정원으로 도망친다. 정원에서 쿤은 다른 시간대의 가족과 만나, 현실의 문제를 잠시 잊는다. 쿤이 다른 가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원의 떡갈나무가 가족의 역사 색인, 즉 도서관으로서 쿤과 다른 시대의 가족을 연결해 준다는 영화의 설정 덕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쿤의 여행을 쿤의 상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떡갈나무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이 굉장히 부실하다. 이 설정은 영화의 가장 후반부에 설명되는데, 그전까지 떡갈나무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다. 고작 15살이 된 미라이가 어떤 경위로 떡갈나무의 진실을 알게 됐는지도 설명되지 않으며, 그저 ‘이러저러해서 지금까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가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이 쿤이 시간여행을 다녀온 다음의 플롯은 다소 뜬금없이 시작된다.
반면 시간여행이 전부 쿤의 상상이었다고 가정하면 많은 장면이 이해가 된다. 정원에서 다른 시간의 존재가 등장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여행은 상상의 전과 후의 시간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쿤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한 세 번째에서 네 번째 여행은 상상의 전과 후의 시간이 크게 차이 난다. 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사건은 쿤의 상상놀이, 세 번째와 네 번째 여행은 쿤의 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세 번째 사건은 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네 번째 사건은 쿤이 다음날 자전거를 타러 가자며 투정 부리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플롯이 끝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모든 시간여행이 사실 쿤의 상상이라고 했을 때, 쿤의 상상여행은 질투라는 내적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쿤의 상상여행은 쿤이 미라이에게 질투를 크게 느꼈을 때다. 그때마다 쿤은 상상이라는 스스로의 힘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 타기에 대한 의지를 다잡고, 미라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는 등 내면적, 외면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래의 미라이>는 아이의 힘을 긍정하는 영화로 보인다. 성장이 타인이 아닌, 오직 스스로를 통해 이뤄진다. 아이 역시 그렇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가족이 제공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은 아이에게 달려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가족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가족의 모습 뿐만 아니라, 포근한 안식처로서의 가족의 모습도 강조된다. 현실 세계에서 엄마의 꾸중이 선생님으로서의 가족을 의미한다면, 상상여행에서 만난 가족은 보금자리로서의 가족을 의미한다. 상상여행에서 만난 가족들은 꼭 한 번 씩 쿤에게 손을 내미는데, 쿤의 성장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꿈이 부모님의 무관심으로부터 도피한 장소라는 점을 떠올려봤을 때, 상상여행에서 가족들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응원과 관심이라는 점이 일맥상통 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가 삐걱거리는 부분은 있었다. 특히 쿤의 CV를 맡은 카미시라이시 모카의 목소리가 네 살 아이와 맞지 않은 중저음이라는 점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신경 쓰인 부분이었다. 서사 구조가 지나치게 반복된다는 인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영화를 환영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 공동체를 다시 바라보게 해 주며, 이제는 기억에서 사라진 어린이의 시각을 관객에게 선물하는 영화는 가치가 크다. <늑대 아이> 이후의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 호소다 마모루는 약간의 변주를 통해 새로움을 시도하고 있다. <미래의 미라이>는 그런 감독의 노력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고집해 온 케모노(괴물) 요소를 완전히 거세하여, 호소다 마모루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소년의 삶을 가장 일상적으로 그려낸 성공적인 작품이다. 그렇기에 호소다 마모루의 색깔이 옅어진 이 작품은 그럼에도 큰 의미가 있으며, 그의 이후 작픔 역시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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