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otki o film milosci>

순수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순진한 것인가 멍청한 것인가. 연인이 맺어지는 과정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배우게 된다. 행동의 이유를 분석하고, 마음을 얻기 위해 절제하며, 상대를 취하기 위해 하는 의도적인 몸짓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체득한 무언가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성이 섞인 감정의 앞에서 순수한 사랑은 무력해진다. 그럼에도 눈인 동시에 태양과 같은 사랑에 대해 찬사하는 옛 시와 연극이 아직 살아있고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변형되어 미디어에 나타나는 이유는 순수만이 줄 수 있는 두근거림, 설렘, 어떤 계산 없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순애가 삶을 생기있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미숙한 한 청년과 이미 익을대로 익은 원숙한 여인의 사랑이야기이다. 민감한 주제일 수 있는 관음증을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불쾌한 감정보다 애잔한 감정이 더 차오르는 영화로 순수 사랑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영화였다.

토메크라는 청년은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있는 마그나를 망원경으로 몰래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일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가까워지고자 그는 증서를 위조하여 마그나가 토메크의 일터를 방문하게 하거나, 우유 배달원이 되어 그녀 집 앞에 찾아간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 토메크가 얻은 것은 사람 대 사람이 주고 받는 온기가 아닌 사무적인 대화 속의 냉기였다. 마그나가 본 연인과 헤어지고 슬퍼하자 토메크는 또 다시 가짜 증서로 마그나를 불러내지만, 오히려 마그나가 우체국 국장에게 비난을 듣는 상황을 만들게 되고, 억울함에 자리를 떠난 마그나를 토메크가 따라가 전후 사정을 고백한다. 마그나는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토메크를 쏘아붙였지만, 이내 그에게 호기심이 들었는지 우유를 배달하러 온 토메크에게 마그나는 말을 건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의 평가는 토메크의 관음 행위를 얼마나 불쾌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크게 갈린다. 토메크의 행동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변태적인 관음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토메크의 행동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관음 행위 자체는 잘못된 표현 방식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을 쓰기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영화는 토메크의 행동을 변태적 행위를 위한 관음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알고 싶어하는 관찰이라고 말한다. 이는 망원경을 통한 토메크의 시선을 보여주는 롱 쇼트들에서 나타난다. 이 쇼트들에서 마그나는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묘사된다. 창문틀은 마치 액자 혹은 프레임처럼 보이며, 토메크는 그 그림을 탐닉하기 보다 오로지 바라만본다. 만약 토메크가 성욕을 충족하기 위해 관음 행위를 했다면 마그나가 애인과 성관계를 맺으려 할 때, 가스 정비공을 부르지 않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관음증을 소재로 하고도 보편적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토메크의 순애가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토메크는 감정이 거세된 인물로 그려진다. 어렸을 적 친부모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 때 울어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이었다는 그는 마그나가 우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며, 대모에게 사람이 우는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마그나에게 공감하고 동정하고 있다는 자신의 마음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자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텅 비어있는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득 차게 되었다. 어떠한 육체적인 관계도 맺지 않고 오직 존재하는 것에 감사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그렇기에 토메크는 마그나를 따라가 “당신을 만나고 싶었고, 그동안 당신을 창 너머로 지켜봤다.”라는 소름돋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마그나의 토메크에 대한 호기심이다. 토메크가 이실직고한 후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애인과 관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우유 배달을 온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묻는 그녀는 발칙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그나는 에로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래동안 사랑을 경험했고 그 사랑의 끝에는 결국 가득찬 욕정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한 원숙한 인간을 대표한다. 그렇기에 마그나는 순수한 사랑을 말하는 토메크에게 모질게 대한다. 자신이 잃어버린 그것을 토메크에게서 발견해버렸기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 상대를 가지고 논 그녀는 결국 토메크를 집으로 데려와 “사랑은 결국 이런거야”라는 말과 함께 토메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만다. 마그나는 외로워보인다. 오랜만에 들었던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겠지만 동시에 질투심.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알게된 것은 토메크를 끝까지 몰아붙인 후였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미쟝센과 음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창문틀의 활용을 포함하여 영화는 롱 쇼트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감독의 미쟝센을 활동한 영화적 언어 활용을 옅볼 수 있다. 또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이다. 흰색은 토메크가 대표하는 순애를 상징하는 반면 붉은색은 마그나가 대표하는 에로스을 상징한다. 흰색의 상징물은 대표적으로 우유를 꼽을 수 있다. 우유는 토메크가 마그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평론가는 순수한 젊은이가 에로스에게 매일 바치는 제물(남자, 흰, 제물…네 그거요)로 바라보기도 한다. 또 우유는 마그나가 이별을 겪고나서 쏟아버린 것으로, 마그나의 현재 마음을 설명하기도 한다. 마그나가 엎어진 우유를 만지며 사색하는 모습은 마치 자신에게서 사라진 순수 사랑에 대해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반면 붉은색의 상징물은 피이다. 토메크가 마그나에게 상처를 받고와 저지르는 자해는 더럽혀진 마음을 속죄하고 불순한 욕정을 비워내기 위한 의식과 같이 보인다. 특히 붉은색의 마그나의 색이기도 하다. 마그나의 방은 대부분 붉은색으로 꾸며져있는데, 이불, 소파(토메크가 수치심을 겪는), 그녀가 그리는 그림 등이 모두 붉은색이다. 그러나 마그나에게도 흰색은 존재하며 이 흰색은 마그나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욕구를 표현한다. 항상 붉은색 이불로 덮혀있는 그녀의 침대이지만 누군가와 성관계를 맺기 위해 커버를 벗기면 그 속은 순백의 시트이다.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붉은색이지만, 그녀가 덫칠하고 있는 색은 역시 흰색이다.
토메크가 병원에 실려가고 그 사실을 알게된 마그나는 토메크의 진심을 알게된다. 퇴원한 토메크를 방문하지만 그의 대모는 단 둘이 있을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이의 토메크는 영화의 첫 장면처럼 마그나에 대한 꿈을 꾸며 기분 좋아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던 선율은 기타의 단률적인 멜로디에서 풍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변한다. 토메크의 망원경으로 자신의 집을 바라본 마그나는 토메크의 시선이 외로운 자신에게 다가온 사랑의 온기였음을 깨닫게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요즘 좋은 영화를 너무 많이 본다. 기분 좋은 일이지만, 영화의 소중함을 잃는 것 같아 불안하다. 무뎌지는 것은 고로 두려운 일이다. 무뎌지기에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감독의 <십계> 시리즈 중 간음을 주제로 한 영화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같은 시리즈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예수로 묘사되는 남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는 두 번 모두 관음을 행하는 마그나가 아닌 토메크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한 번은 흐뭇해하며, 한 번은 의아해하며(라고 생각한다) 바라보는 신. 이는 순수에 대한 신의 동정일까, 관음에 대한 신의 경멸일까. 질문이 많이 생기는 영화다. 실제와는 많이 다른, 그러나 모두가 잃어가는 순수 사랑에 대한 긍정. 그것을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것이 이 영화에 감동받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별!점: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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