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imal Farm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을 여러 권 썼다. 그의 대표작인 <카탈루냐 찬가>와 <동물농장>, <1984>는 조지 오웰의 후기 작품들로 분류되는데, 세 작품 모두 당대 사회주의의 부패와 자유 박탈을 고발했다. 그 중에서도 <동물농장>은 그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설 수 있게 만든 작품으로, 작품이 쓰인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중, 고등학교에서 필독서로 지정하고 있을만큼 명작이다. '풍자 우화'라는 독특한 형식 덕분에 <동물농장>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고, 그 때문에 현재까지 많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나 역시 이 책을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 때 두 번 읽었으며, 이번에 읽은 것까지 합쳐 총 세 번을 읽었지만, 3번 모두 막힘없이 완독을 했다. 농장에서 돼지나 말이 인간처럼 대화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이 동화를 읽고 있는 느낌이었고, 작가의 간결하면서도 자연주의적인 묘사 덕분에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과거 독자에게 뿐만 아니라 현재의 독자에게까지 "강한 적절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혁명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배반'에 대해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쓰이고 출판된 시기가 1940년대라는 것을 고려하면 <동물농장>에서 일어난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 연합과 1대 1 대응이 될 정도로 비슷하다. 늙은 돼지 메이저는 마르크스를, 독재자 나폴레옹은 스탈린과 연결되며, 다른 동물들도 실제 인물과 하나하나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소련이 망하고 글로 밖에 그 시대를 경험할 수 없는 현재 세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련이라는 단 하나의 권력 구조과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다. 이 풍자가 공격하는 "시대적인 과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물농장>은 특정 시대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정치 체제의 문제를 담고 있다. 그 문제는 국가 구성원에 대한 엘리트의 독재와 배반이다. 소비에트 연합과 더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부패한 독재자들은 어디에서나 있었다. 과거 프랑스의 독재자 나폴레옹(어찌 보면 <동물농장>의 독재자의 이름이 나폴레옹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이나 10년 전까지의 카다피도 모두 혁명을 통해 절대권력을 손에 넣어 부패한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책의 줄거리를 하나하나 짚으며 소비에트 연합의 상황과 비교하는 작업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이다. '동물농장' 같은 혁명의 배반과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을 습득하고 권력을 가진 자가 모두가 합의한 사회의 규율을 어기려고 할 때 적절하게 견제해야 한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돼지를 제외하곤 거의 글을 읽지 못했다. 대부분 알파벳 C 이상을 읽지 못했고, 따라서 '동물농장'의 법칙인 7 계명 같이 글을 읽어야 할 경우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소수의 동물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지식을 의존하게 된 동물들은 7 계명이 돼지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어도 잘못됨을 인지하거나 그에 대해 항의할 수 없었고, 결국 돼지들의 앞잡이인 스퀼러에게 현혹되어 권력이 돼지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권력가를 견제하고 적절한 견제를 위해 최소한의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만의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이다. 나는 이 책에서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살짝 옅볼 수 있었고,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해보았다. 사실 사회주의만큼 매력적인 정치 제도는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의 구성원(최소한 지도자 층)은 이 유토피아에서 어떤 삶을 원할까? 이 답은 스노볼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다른 동물들에게 풍차 건설을 설득하면서 풍차를 완성한다면 모든 동물이 주 3일만 일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남는 시간 동안 정신 계발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사회주의의 이상향은 적은 노동으로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남는 시간 동안은 레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과학기술이 필요하고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풍차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보여주었듯이 사회주의는 성공하지 못했다. 생산품을 똑같이 나누기 때문에 창의적인 경제활동과 과학발전을 유도하지 못했고, 스탈린을 비롯한 독재로 인해 인민의 삶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먼 미래에 과학 기술이 크게 진보하여 모든 노동과 행정을 로봇과 AI가 관리하고, 인간은 일반 노동뿐만 아니라 정치 노동 모두 참여할 필요가 없어 독재가 생기지 않는 사회가 가능하다면 완전한 사회주의는 탄생할 수 있다. 물론 기계의 인간지배, 인간으로부터 노동에 대한 기쁨 탈취 같은 다양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모든 인간이 똑같이 소비하고 평등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사회는 가능할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책을 통해 사회주의를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열렬한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영제국 시절 제국주의를 비판했고 민주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수필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자연주의적인 서술과 이 책을 쓰던 당시 자신이 글을 쓰게 하는 '고발'이라는 원동력 사이의 균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연을 세세하고 풍성하게 표현하는 자연주의적인 문체에 어렸을 때부터 푹 빠져있었고 그런 스타일을 자신의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1,2차 세계 대전이라는 혼란한 시기에 글을 쓰는 작가로서 그가 진지하게 쓰는 작품은 모두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인 글이 예술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동물농장>이다. 작가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로 <동물농장>은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인 정치 방법을 옹호하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동물들의 행동 묘사나 '동물농장'의 전경 묘사는 아름다울 정도로 꼼꼼하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담고 있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의 글자 하나하나가 한 편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가치 때문에 20세기의 명작 중 하나로 현대인들에게 읽히고 있다.